2009년 10월 17일 토요일

사라는 와코의 이름을 부른다 - 가노 도모코



1999년 집영사(슈에이샤)
2002년 문고판

<사라는 와코이 이름을 부른다(이하 사라와코)>가노 도모코의 7번째 작품입니다. 총 10 개 단편이 실렸는데요, 이 중에 2편은 3-4페이지 분량의 쇼트쇼트에 가까운 단편이고, 또 2편은 20페이 안팎의 역시 적은 분량의 단편입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대략 7개 단편이 실린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분량 얘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라 와코>의 특이점은 기존 가노 도모코 세계와 공통되는 부분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녀만화를 보는 듯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캐릭터의 내면이나, 고민하는 캐릭터에게서 느껴지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작가의 기존 작품 노선과 같습니다. 하지만 '유령'이 나오고 '패러럴 월드'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면 일상 미스터리를 주로 다루던 가노 도모코가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령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한 리얼 미스터리였다거나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유령'이 등장하죠.

제일 처음에 수록된 '검은 베일의 귀부인'을 봅시다. 주인공 유타는 우연히 다 쓰러져가는 병원 건물안에 들어갔다가 '레이네'라는 꼬마 소녀를 만납니다. 하지만 진짜 레이네는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이고, 유타가 병원에서 만난 레이네는 '生靈'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트릭'도 없습니다. 정말 생령이에요.

사실 첫 단편을 보고 - 물론 그 안에는 병원에서 의료사고로 죽었다는 소년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가 존재하긴 합니다만 - 많이 당혹스러웠습니다. 진짜 유령을 들고 나와서 판타지를 만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 수록된 단편 '엔젤 문'으로 들어가면 이게 또 달라집니다. 엔젤 문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공에게는 젊었을 적 배 사고로 죽은 아내가 있었는데요, 아내가 학창시절 남긴 일기에 엔젤 문이라는 카페가 등장하고 카페의 마스터랑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는 내용이 수록되 있습니다. 그걸 보고 주인공은 엔젤 문이란 카페를 만들었고, 비오는 날이면 아내를 똑닮은 소녀가 찾아오고 아내의 일기장에 있던 내용와 토씨하나 안 틀린 대화를 그 소녀와 나눈다는 단편입니다.

첫 단편을 보고 유추하자면 아내를 닮은 소녀는 역시 '유령'이 아닐까 싶죠.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조카 소녀가 거기에 의문을 품고 해결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해결은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입니다. 일말의 우연이 끼어들었다고 해도 말이죠.

세번째 단편은 '프리징 섬머'입니다. 여기서는 다시 판타지로 바뀌었다가 네 번째 단편 '천사의 도시'에서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죠. 그리고 이어서 쇼트쇼트가 이어지면서 판타지스런 분위기를 고조하다가 - 특히 '상점가의 밤'이 분위기는 단편집 중에 제일 좋았습니다. - '오렌지 반쪽'과 표제작인 '사라는 와코의 이름을 부른다'로 마무리를 장식합니다.

'오렌지 반쪽'은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혼동케하다가 알리바이물이면서 서술트릭을 이용한 팡 터트리는 맛을 보여주는 단편입니다. 개인적으로 꽤 마음에 들었네요. 추가로 <손바닥 안의 작은 새>의 번외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표제작 '사라 와코'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할법한 - 사이코패스는 제외 - 인생의 분기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판타지일 듯 하다가 미스터리로 변했다가, 미스터리인 줄 알았더니 판타지였다거나, 그런 식으로 단편이 번갈아가면서 나오다보니 아무래도 독자는 혼란스러워집니다. 다음 단편은 과연 어떤 내용일지 하고 말이죠.

뭐 이런 구조가 가노 도모코의 독창적인 면모였다면 아마 꽤 높은 점수를 받았겠지만 아쉽게도 수십 년 전에 추리의 여왕이라 불린 모 여사께서 이미 시도한 구성입니다. 가노 도모코가 실제 거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모르고 썼는데 그렇게 된 건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히 유사한 구조의 단편집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의심을 사기에 좋겠죠? 뭐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 미스터리라고 해봤자 결국은 영미권의 연장선상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죽음의 사냥개>를 아는 독자라면 <사라 와코>는 훗~하고 넘어가시면 되고, <죽음의 사냥개>는 뭐시여? 먹는거여? 하시는 독자라면 <사라 와코>는 꽤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담) '오렌지 반쪽'만 다른 단편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알고보니 출전이 '부재증명'이란 소재를 이용한 앤솔로지 단편집이더군요. 하지만 판타지 or 미스터리의 경계선에 위치한 본서에 같이 수록되서 오히려 더 빛을 발한 단편이 아닐까 싶네요.

평점 5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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