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노블레스 클럽> 브랜드의 첫머리를 장식한 하지은의 장편 판타지 <얼음나무 숲>. 사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하지은이란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단순히 '음악'을 소재로한 판타지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반 호기심, 반 도박하는 심정으로 책 표지를 넘겼다. 하지만 약 400 페이지에 달하는 적잖은 분량의 소설을 단숨에 읽고 나서 느낀 '환희'는 도박에서 이겼다는, 아니 대박으로 승을 거머쥐었다는 환성이란 이름 감동이었다.
1628년 에단이라는 음악의 도시. 귀족가의 자제이면서 바옐에 버금가는 천재 피아니스트이면서 스스로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 순수한 캐릭터 고요. 겉으로는 천재 중의 천재인 바이올리니스티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한 노력을 아낌없이 하면서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바옐. 감초같은 역할을 하면서 바옐과 고요 사이에 다리는 건네주기도 하는 첼리스트 트리스탄. 이렇게 <얼음나무 숲>은 세 명의 주인공이 '키세'라는 예언가가 말하는 종말론이 지배하는 에단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바옐과 음악 결투를 했던 남자의 약혼녀가 불가사의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소설은 점점 절정으로 향해갑니다. 살인사건은 점점 바옐과 가까운 사람이 피해자가 됩니다. 고요는 바옐의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자하고, 트리스탄은 예언가 키세를 찾아다니고, 바옐은 고요에 대한 열등감을 억누르고 단 하나의 청중을 위해 혼신을 다한 연주를 합니다. 하지만 결말은.........
소재는 일단 음악이지만, 배경도 그렇고 설정도 그렇고 막말로 무국적 스타일의 몽환적인 분위기입니다. 따라서 음악적 소양이 전혀 없더라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독자를 배려하고 있습니다. 환상적 분위기는 아무래도 무국적이란 요소가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정 지역 특정 배경을 무대로 했다면 리얼리즘은 살릴 수 있었겠지만, <얼음나무 숲>이 주는 분위기는 살려내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얼음나무 숲>의 모호한 무대배경은 적절한 선택인 것이죠.
여기에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범인도 나오는 등 마지막에 하나 하나 맞춰져가는 퍼즐적인 요소까지 포함하자면 <얼음나무 숲>도 광의의 미스터리에 포함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제가 생각하던, 미스터리 플롯은 어떤 장르의 소설에도 통용되는 보편적 재미의 기본 핵심이란 점을 <얼음나무 숲>은 잘 살리고 있죠. 물론 범인의 정체에 관해서 좀 더 비꼬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얼음나무 숲>의 본질은 who done it이 아니다보니 저의 이런 불만은 지엽적일 뿐이겠지만요. 그럼에도 <얼음나무 숲>은 환상적인 면모가 더 강한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겠네요.
이런 균형을 유지하는 요소로, 단지 글로만 이루어졌는데도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소설을 읽는내내 귓가를 떠나지 않는 듯한 분위기를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큰 차지를 합니다. 캐릭터들의 감정이 표출해내는 갈등,반복과 화해가 잘 이루어져서 차갑지만 따뜻한 몽환적 미스터리로 불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직도 유행중인 '이계진입 깽판물' 같은 양산형 판타지에 질렸거나 - 이건 이것대로 대리만족의 효과를 누릴 수는 있습니다만 - 일본산 라이트노벨을 필두로한 모에 요소로 뒤범벅이된, 읽고 나서 팬티 색깔만 기억나는 '미소녀물 판타지'에 식상한 독자가 있다면 <얼음나무 숲>을 조심스레 추천해 봅니다.
평점 8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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