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8일 금요일

달을 향한 사다리 - 히구치 유스케



2005년 문예춘추
2008년 문고판

지능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사이 정도지만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겨준 '행복장' 관리인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는 40살 먹은 주인공 '후쿠다 사치오(男)'.(일명 '보쿠상'이라고 불리는데, 딱히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려워서 여기서는 원래 이름은 후쿠다로만 칭합니다.) 입주민들과 사이좋게 살면서 '내가 모두를 친절하게 착한 사람이 되면, 다들 착한 사람이 될거야' 라는 인생관을 견지해온 후쿠다의 소소한 일상이 하루 아침에 깨집니다. 맨션 외벽 페인트 칠을 하던 후쿠다는 입주민중 한 명인 '구리무라 요코'가 자기 방 안에서 나이프에 찔려 죽어있는 장면을 보고 맙니다. 사다리에 타고 있던 후쿠다는 충격으로 바닥에 떨어지고 정신을 잃고 말죠.

그리고 병원에서 나흘 만에 정신을 차린 후쿠다는 뭔가 이상합니다. 예전에는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지고 - 두통은 나지만 - 다른 사람들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며 기억을 잘 못하던 것들이 없어지고 여러가지 기억이 다 납니다. 그러나 후쿠다 앞에 기다리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후쿠다가 병원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입주민 전원 - 죽은 사람은 제외 - 이 야반도주(....)를 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항상 '행복'하고 '선량'하게 살아온 후쿠다 앞에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그렇게 처음부터 가짜였던 겁니다.

알바로 생계를 꾸려나간다고 생각했던 청년은 상습 빈집털이범이었고, 대학교 조교수라던 남성은 학교에서 짤린지 반년이 넘었고, 짤린 이유가 실습실에서 각성제 제조를 하다가 학교에 적발당했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입주민 중에 두 명은 아예 신분을 위조로 해서 입주했고, 마지막 한 명은 여성 속옷만 훔치는 변태범이었습니다.

행복했던 후쿠다는 사고로 지능이 정상으로 돌아오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알아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죠. 살인 사건이 일어난 맨션, 입주민이 없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생계, 부동산에서는 맨션을 허물고 오피스텔을 지으면 어떻냐는 등 제안도 들오오는 등 후쿠다는 급박하게 바뀌는 현실 속에서 유연하게 대처해 나갑니다. 겉으로는 예전의 지능이 떨어지는 듯한 연기를 하죠. 그러면서 사라진 입주민의 행방을 찾고, 사건도 조사하게 됩니다.

소설의 기본 포인트는 지능이 떨어지는 주인공이 사고로 우연찮게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설정입니다. 아마 가장 직접적으로 떠오르는 녀석은 다니엘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을>일 겁니다. 국내에는 <오! 하나님>인가 하는 드라마 원작으로 알려졌겠지만, 원작 자체가 상당히 유명한 소설이죠. 그리고 방식은 좀 다르지만 <페노메논>도 비슷한 범주에 넣을 수 있겠네요. 이 밖에도 많겠지만 이런 스타일은 이제는 어찌보면 정형화된 소재이기도 한데요, <달을 향한 사다리>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내용만큼 <앨저넌에게 꽃을>과 초반은 유사합니다.(히구치 유스케 스스로 말하기를 <앨저넌에게 꽃을>이란 소설을 몰랐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역시 히구치 유스케 다운 부분은 그런 내용임에도 소설 안에는 유머가 가득합니다. 순진무구했던 후쿠바다 변신(?)한 캐릭터는 능글맞은 중년탐정 유즈키 소헤이와 흡사한 구석이 있고, 여성 속옷 도둑이었던 변태범이자 학원 강사인 입주민 '모노후베'는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한 기분이 드는 재밌는 조역이기도 합니다. 후쿠다와 모노후베 둘 이서 밀실을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나, 속옷을 갖고 후쿠다가 모노후베를 놀리는 대화장면 등이 참 재밌게 그려집니다. 모노후베는 딱 만화같은 캐릭터죠.

추리입장만 보자면 사건 자체는 단순합니다. (그렇게까지 단순무식하지는 않지만) 밀실살인이지만, 당연히 밀실이란 것이 말이 안되고, 살해당한 이가 있으면 살해자가 있을 것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건자체도 상당히 빨리 해결됩니다. 아직도 페이지가 많이 남았는데 끝나서 좀 어이가 없다 싶지만요. 물론 여기서 다른 쪽의 기대를 하는 독자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진짜 진상은 이게 아니겠구나! 하면서요. 그러나 <달을 향한 사다리>는 다른 의미에서 독자의 기대를 철저하게 부숩니다. 독자를 가감없이 때리는 반전은 충분히 납득이 가고 - 비록 복선이 없다고 해도 - 그렇게 끝이 났기 때문에 착잡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의 여운이 달콤 쌉싸름하게 남지 않나 싶네요. (소설에 쓰인 소재와 다른 영화, 소설로 대략적인 예상을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과연 그런 결말일지는.........?)

살인사건 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뒷통수가 땡기는 미스터리입니다. 역시 히구치 유스케 미스터리는 범인과 동기 등 사건의 진상을 까발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게 장점일지 단점일지는 독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겠지만요.

평점 6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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